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1세(신성 로마 제국)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슈바벤]] 공작 프리드리히의 아들로 1152년 [[호엔슈타우펜 왕조]]를 연 작은 아버지 [[콘라트 3세]]의 지명으로 [[로마왕]]위[* 로마인의 왕. 혹은 독일인의 왕으로 [[독일왕]]도 있는데, 둘 다 혼용되어 사용했다.]에 올랐다. 황제가 된것은 1155년부터. 즉위하자마자 [[독일]] 국내의 안정에 주력해 "국내 평화령"을 발표해 치안안정에 주력하는 한편, 대립관계에 있던 벨펜가의 [[하인리히 사자공]]에게 [[바이에른]]을 양보한 후 일단 화해했다. [[왕권]] 강화를 위해 [[오스트리아 공국]] 등을 신설했고 [[폴란드 왕국]], [[헝가리 왕국]]을 굴복시켰으며 [[부르군트 왕국]]의 왕위를 획득하여 위세를 전 유럽에 떨쳤다. 특히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경략에 적극적이어서 1154년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[[이탈리아]] 원정에 나서 [[롬바르디아]]를 장악하여 롬바르디아 왕위에 오르는 한편 옛 [[부르군트 왕국]]에서 출발해 롬바르디아 옆 [[피에몬테]]를 장악한 [[사보이아 백국]]의 [[움베르토 3세]]를 제압하고 더 나아가 교황까지 억눌렀다. 그러나 [[교황]]과 대립하여 [[롬바르디아]] 지역에서 [[구엘프]]당[* 교황 지지자들]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고 1176년, 레나노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여 화의를 맺으면서 전 유럽에서 망신을 샀다. 1180년에는 자신을 원조하지 않던 [[하인리히 사자공]]을 추방하고 그 영지를 부하들에게 분할하여 나누어 주었고, 1186년에는 아들인 [[하인리히 6세]]를 위해 [[시칠리아 왕국]]의 왕위계승권을 얻는데 성공하였다.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중앙집권적 [[봉건주의]]식 통치는 의도하지 않게 영방국가들의 발전으로 이어져 후에 황제권 약화의 길을 열고 만다. || [[파일:external/www.bryanhoey.com/richard_dramatic.jpg|width=700]] || '''[[십자군 전쟁]] [[3차 십자군|3차 원정]](1189 ~ 1191)에서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많은 병력[* 상당수의 책들이 10만, 혹은 이를 전후하는 규모로 묘사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이것이 과장된 숫자라고 여기며, 실제로는 3~4천명의 기사를 포함한 12,000~15,000명 선의 군대였다고 여겨진다. 다만 이것도 단일 십자군 영주로서는 많은 병력이다.]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[[소아시아]]의 살레프강을 건너던 중 사망했다.''' 사인으로는 [[심장마비]] 혹은 [[익사]]가 거론된다. 아마도 고령에 찬물에 입수한 것이 원인인 모양.[* 소설가 [[시오노 나나미]]의 표현에 의하면 "분명 더운 날씨였을 거고([[아나톨리아 반도]]가 더운 지역인지는 차치하더라도) 막대한 군장은 군사들을 지치게 했다. 그런데 강이 나타났다? 식수다! 피서지다! 프리드리히 1세도 예외는 아니었는데, 체통은 지켜야겠지만 강도 건너면서 그 짓도 할 겸 들어갔다 군장에 나이가 나이라 '''그대로 꼬르륵'''......(즉위한 당시 나이 33살 추정, 이미 사망할 당시 68살로 70에 가까운 나이였다.)", "늙은이의 냉수"(나이에 걸맞지 않는 행동, [[경거망동]]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볼 수 있겠다.)라는 일본 속담을 덧붙였다.]《[[미디블2: 토탈 워 - 킹덤즈]]》에서도 <십자군 캠페인>을 하다보면 이 이벤트가 떠버리며《[[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]]》의 <[[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: 에이지 오브 킹/캠페인 공략/바르바로사|바바로사 캠페인]]>에서도 무덥고 고된 행군끝에 십자군 일행에 합류한 이후 살레프강이 보이자 신이 나서 고령의 나이로 쇠사슬 갑옷을 입고 뛰어들다가[*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듯 고증적으로 훌륭한 것이다. 정작 게임상에서는 대장간에서 풀업시 판금 갑옷 사용이 가능하다.] 십자군들이 보는 앞에서 사망한다. 이때 그의 부하들은 쇠갑옷 무게에 눌려 수영을 못하고 익사했다는 설과 갑작스러운 찬물에 심장마비가 발생해 죽었다는 설을 거론한다. 그가 죽은 뒤 그의 시신을 [[예루살렘]]에 매장하기 위해 염을 해야 했는데,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급사였고 야전에서 제대로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는 점. 장기간 시체를 보존하려면 소금으로 부패를 막아야 하는데 당시엔 소금이 매우 귀했으므로 야전에서 이를 구하기 힘들었고, 할 수 없이 식초에라도 절여서 부패를 막아보려 했다. 하지만 식초는 단백질이 변형시켜 무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의 시신은 뼈와 살이 분리되어 초절임 비슷하게 되어버리고 만다. 결국 살은 [[안티오키아]]의 대성당에, 뼈는 [[티레]] 대성당에, 심장과 다른 장기들은 [[타르수스]]에 각각 매장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